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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쓰기/연습장

로져~ 로져~ (KBS 블랙이글 특집)

20살의 겨울은 칙칙한 회색이었다. IMF터진 후라 그런지 유독 추웠다. 나도 부모님에게 용돈을 구하긴 더욱 더 어려웠다. 다행히 외삼촌이 힘을 써주셔서 외삼촌이 넘버투~로 있는 전자회사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전자회사는 허름했다. 작업장에는 텁텁한 전자제품 특유의 냄새로 가득찼다. 직원들이 입는 짙은 자주색 작업 잠바는 공돌이 특유의 딱딱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곳은 찬바람 쌩쌩부는 우울한 공단안에 칙칙한 작업장 이었다.


그때 나이 많은 작업장 반장은 대리였다. 대리님이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며 장난을 치곤했다. 어느날 너는 군대 언제 가냐. 너는 군대 어디로 갈거냐. 말을 걸어온다.


나는 내년에 군대를 갈것이고 공군으로 갈 것인데 하사관(당시는 하사관) 합격해서 공군 하사로 갈꺼라고 했다. 대리님이 놀래서 묻는다. 이야~ 하필 생뚱맞게 거길 가냐~ 나는 말했다. 나는 비행기 조종사는 되진 못하지만 비행기가 뜰때 선글라스 끼고 수신호로 비행기를 인도하면서 비행기를 띄우기도 하고, 비행기가 착륙할때 조종사와 교신하며 로져~ 로져~ 하며 말하는 멋진 공군 요원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때 내가 진지하게 혀를 꼬며 로져~ 로져~ 라고 말할때 대리님이 크게 웃었다.  한동안 작업장에서 내가 말한 로져~ 로져~가 화제거리로 얘기되기도 했다.


보통 소년들이 로보트나 밀리터리 장비에 대해 동경을 갖는다. 나는 특히 전투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미국 항공모함에서 선글라스 끼고 멋진 수신호로 비행기를 인도하는 군인이나, 관제 센터에서 조종사와 멋들어진 영어로 교신하면서 교신 끝에 '로져~' '카피~뎃~' 하는 맨트가 너무도 멋있어 보였다. 



[나는 꼭 이런 요원이 되고 싶었는데..]


그때 마침 여러가지 상황이 맞아 공군 하사관으로 가기로 했고 나는 저런 멋진 일을 하리라 다짐했다.


공군에 입대하여 14주동안이나 빡씨게 훈련을 받았다. 일반 사병보다 하사관 후보생 이상은 훈련이 고되었다. 공군 훈련이 쉽다고 하는데 하사관 후보생 이상은 힘들다. 일반 사병이 맨몸에 도보로 이동할때 우리는 총들고 완전군장 매고 구보로 이동했다.  


훈련을 받으며 공군의 여러 특기들을 알게 되고 내가 하고 싶은일을 하려면 어떤 특기를 받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일단 '로져~ 로져~' 멋지게 말하려면 항공 관제 특기를 받아야 했다. 선글라스 끼고 수신호로 비행기를 인도하려면 비행 정비 특기등의 비행기와 밀접한 특기를 받아야 했다.


나는 소년의 설레임처럼 꿈꾸던 이런 멋진 특기를 받기를 희망하고 고대했다. 그런데 인기있는 항공 관제나, 비행기 정비 특기는 가산점을 많이 받는 사병 출신 후보생들이 유리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어린나이에 전략적인(?) 특기 희망을 해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것이 항공 전산 장비 정비라는 특기에 희망을 했는데 알고보니 이 특기도 사병 출신 후보생들이 많이 지원했다.


그래서 나름 전략적이었던 항공 전산 특기 희망도 탈락되고 나는 무작위로 통신특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통신특기중에서도 레이더 정비 특기를 받아 나는 공군이었는데도 그렇게 동경하던 전투기는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시골 산 꼭대기 레이다 기지에서 거대한 레이더만 목 아프게 쳐다보다 제대하게 되었다. 2001년 부터인가 공군에서도 여군을 받았는데, 여군이 시골 산 꼭대기 격오지는 오지 않을테니.. 전투기와 더불어 여군도 못보고 제대했다.


만약 내가 내가 원하는 관제나, 비행기 정비 특기를 받았으면 아마 군대에서 계속 장기복무 했을것이고,  프로그램 개발자로는 생활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 블로그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 중 하나였다.


4년 4개월간의 아쉽기도 한 군생활을 마치고 좌충우돌 인생을 산지 10년, 무심코 본 KBS 스페셜 프로에서 나는 이런 아늑한 옛날 군생활과 잊혀진 내 꿈을 생각하게 한 멋진 프로그램을 보았다.


공군 특수 비행팀 블랙이글이 최초로 해외 영국에 진출하여 최고의 기량을 펼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블랙이글 팀은 영국 두개의 에어쇼에 처음 나가 당당히 최우수상을 두번이나 받았다. 


참모총장이 영국에서 직접 조종사들과 요원들을 치하하는데 눈물을 흘리신다. 6.25 이후 가난한 맨바닥에서 시작한 우리 공군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라고 인정받으니 모두 눈물을 흘린다.


이때 이런 감동적인 스토리와 블랙이글의 멋진 묘기, 그리고 아름답기 까지한 전투기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잊었던 옛날 꿈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도 선글라스 낀 조종사들의 멋진 모습도 나오지만 전투기를 정비하고 관제하고 인솔하는.. 역시 선글라스 낀 멋진 공군 요원들이 늠름하게 출연한다.


아~ 내가 그때 특기만 잘 선택했으면 저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진급 잘 되었으면 상사즈음 되었을텐대..  그러나 지금도 내가 잘할수 있는 일을 찾아 나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만족한다. 







옛날의 향수를 짙게 맡게 해준 블랙이글팀의 멋진 모습, 그리고 KBS의 훌륭한 프로그램에 찬사를 보낸다. 


블랙이글 방송을 보면서 잠시나마 나는 전투기를 처음 봤을때 두근거렸던 소년이 되었고, 멋진 공군 요원이 되리라 꿈꿨던 꿈 많은 20살의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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