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백구와 오래된 친구

1. 나는 개다. 하얀털을 가졌다. 사람들은 나를 백구로 부른다. 나는 2002년도에 태어났다. 처음 주인님에게 입양 되었을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고 그 사랑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주인님과 가족들은 나를 끔찍히 예뻐해 주셨다.

내가 강아지였을때 주인님은 한창 연애를 했다. 주인님의 여자친구도 나를 예뻐했다. 우리 셋은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 어린생명에서 젊은생명으로 뻗어나려는 그 에너지를 주체 못해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인님과 추억을 쌓았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 듬직한 개가 되어 주인님과 가족을 지켜주었다. 이제는 주인님의 발자국만 들어도 주인님의 기분을 짐작하게 되었다. 지금 늘어지는 발자국은 안좋은일이 있구나, 힘이 느껴지는 지금 발자국은 즐거운 일이 있구나. 나에게 주인님은 정말로 주인님이었고 신이었고 내가 존재하는 모든 가치였다.

강아지였을때는 사랑을 독차지 했고, 젊었을때는 듬직한 믿음을 주었던 나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다. 주인님의 나를 향한 애정은 여전했지만, 나는 내가 주인님에게 큰 도움을 못주고 있다는 사실에 무력했다. 주인님은 아니라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 나에게서 힘이 빠져나갈때마다 내 미래를 고뇌했다. 개의 인생은 다 이러할까.

주인님이 강아지를 입양했다. 강아지에게서 아늑한 옛날의 내 모습을 보았다. 스쿼시 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놀라운 에너지를 그 강아지가 갖고 있다. 나는 잠깐 추억에 젖었고 곧 닥쳐올 내 미래를 덤덤히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주인님은 나를 잘 못 다루는 느낌이다. 전 주인님은 눈빛만 봐도 손발이 척척 맞는 느낌이었지만 새로운 주인님은 나를 다루기 어려워 했다. 우리가 친해지기 까지는 오래 걸렸다.

새로운 주인님은 나랑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주인님과 주인님의 친구와 내가 같이 등산을 했다. 지금 2010년 늙은 개가 된 나는 등산을 버거워 했다. 비틀거리며 올라가다가 실수로 절벽같은 언덕에서 굴렀다. 나는 다쳤다. 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인님은 어쩔줄 몰라했다. 산 중턱에서 병원까지 가기도 어려웠다. 나는 눈만 껌벅 껌벅 했다. 주인님이 이 낭떠러지 밑으로 내려오지 못할것 같았다.

이때 주인님의 친구가 그 거칠고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모래와 미끄러져 모래 먼지가 친구를 덮었다. 주인님의 친구는 위험을 무릎쓰고 나를 구출하고 응급 치료를 했다. 주인님 친구의 온몸이 먼지와 내 피로 더러워졌다. 주인님은 말없이 친구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살았다.

2. 나는 차다. 하얀색으로 도색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스OO라 라고 부른다. 나는 2002년식이다. 내가 공장에서 출고되고 얼마 뒤 주인님이 나를 가져갔을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존재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고 그 사랑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주인님과 가족들은 나를 끔찍히 예뻐해 주셨다.

내가 신차였을때 주인님은 한창 연애를 했다. 주인님과 여자친구 이름 이니셜에 하트를 섞어 내 엉덩이에 붙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주인님 같은 젊은이들이 좋아할만한 멋진 차였고 힘도 넘쳤다. 공장에서 막 출고된 싱싱한 엔진의 힘을 주체 못해 나는 주인님과 그 가족들을 힘차고 편안하게 이리저리 모셔드렸다.

3년정도 되었을때 나는 주인님과 가족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차가 되었다. 이제 주인님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주인님의 핸들 미세한 돌림과 클러치와 엑셀을 누르는 주인님의 능숙한 발놀림을 느끼면 나는 안정되면서도 힘차게 나아갔다. 나에게 주인님은 정말로 주인님이었고 신이었고 내가 존재하는 모든 가치였다.

신차였을때는 주인님의 연애를 도와주었고, 능숙한 차가 되었을때는 가족들의 든든한 이동 수단이었던 나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다. 주인님의 나를 향한 애정은 여전했지만, 나는 내가 주인님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력했다. 나이가 들어 나에게서 힘이 빠지고 가끔 덜덜 거릴때마다 내 미래를 고뇌했다. 차의 인생은 다 이러할까.

새로운 주인님은 나를 잘 못 다루는 느낌이다. 시동을 많이 꺼트려 먹고 주차도 서툴다. 전 주인님은 눈빛만 봐도 손발이 척척 맞는 느낌이었지만 새로운 주인님은 나를 다루기 어려워 했다. 우리가 친해지기 까지는 오래 걸렸다.

새로운 주인님은 나랑 친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주인님과 나와 주인님의 친구들은 여름휴가지로 갔다. 나는 주인님과 친구들을 태우고 이리저리 이동했다. 그런데 유독 그날따라 내가 무척 덜덜거렸다. 주인님과 친구들은 불안해했다. 결국 한적한 시골길에서 마후라 파이프..가 떨어져 도로위에서 질질 끌려다녔다.

주인님과 친구들은 나를 멈추고, 내 배를 관찰했다. 마후라 파이프가 부식되어 한쪽이 완전히 떨어졌다. 모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주인님의 친구가 좁고 좁은 내 밑으로 포복하여 들어갔다. 거친 모래 알갱이들이 주인님 친구를 괴롭혔다. 주인님의 친구는 마후라 파이프와 내 차를 천으로 고정시켰다. 좁디좁은 내 밑에서 겨우 빠져나온 주인님 친구의 모습은 모래먼지 투성이에다가 모래 알갱이 때문에 피부에 상처도 입었다. 주인님은 친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우리는 살았다.

[내 차의 마후라 파이프가 떨어졌다. 친구가 노란 헝겊으로 임시 조치하는
희생과 재치를 보여준 덕분에 정비소로 무사히 갔다.]

3. 나는 얼마전 친구가 타던 차를 저렴하게 샀다. 나는 내 차를 늙은 백구라고 부른다. 하지만 늙은 백구도 한때는 지금의 라세티 프리미어나 포르테처럼 멋진 모습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을 차였다. 이 차는 수동이라 내가 운전에 익숙하기까지 꽤 힘들었다. 사실 지금도 초보운전으로 곧 익숙해지기를 바랬다. 이번 여름휴가에 늙은 백구를 끌고 가다 마후라 파이프가 떨어지는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어떻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가 솔선수범하여 사람 몸이 안들어갈 차 밑에 비집고 들어가 내 차를 임시조치 해주었다. 임시조치 후 겨우 차 밖으로 나온 친구의 모습을 보니 땀범벅에 모래먼지 범벅에 거친 모래 알갱이에 작은 상처들도 입었다. 나는 친구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속으로 감동했다. 차 주인인 나도 힘들까봐 못한 일을 친구가 앞장서서 해결해 주었다. 그 친구에게서 진짜 오래된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친구의 일을 내일보다 더 생각해 주는 진짜 친구. 모래 알갱이에 입은 상처에 땀으로 범벅된 친구의 모습이 자꾸 생각난다. 나는 그 친구처럼 되려면 한참 멀었다.

[그리고 늙은 백구지만 이놈 때문에 엄청 편해졌다.]